유엔 적국 조항이 또 나왔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일본을 포함한 2차 세계대전 패전국 관련 조항을 빨리 삭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본의 명예가 걸린 문제”라는 말까지 붙였다.
처음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아니, 전쟁 끝난 지 80년도 넘었는데 유엔 헌장에 아직도 일본을 ‘적국’으로 보는 조항이 남아 있었어?
남아 있다.
그리고 더 묘한 건, 유엔은 이미 2005년에 이 표현을 지우기로 합의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__21년째__ 그대로일까.
📜 적국 조항이 뭐길래
적국 조항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만들어진 유엔 헌장의 옛 규정이다.
당시 승전국이 독일·일본 같은 패전국의 군사 도발이 다시 일어난다고 판단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허가나 선전포고 없이 군사 조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유엔 헌장 53조, 77조, 107조에 관련 표현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 그대로 전쟁이 끝난 직후의 불안 속에서 만들어진 문장이다.
지금의 일본은 1956년에 유엔 회원국이 됐고, 이 조항은 현실에서 쓰이는 규정으로 보긴 어렵다. 일본은 그동안 이 조항이 이미 시대에 맞지 않아 사실상 효력을 잃었다고 주장해 왔다.
실제로 유엔 회원국들은 1995년 이 조항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봤고, 2005년 정상회의에서는 헌장에서 ‘적국’ 표현을 삭제하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지우기로 했다”와 “실제로 지웠다”가 전혀 다른 일이라는 데 있다.
🚪 지우기로 했는데, 왜 아직 남았나
유엔 헌장은 문장 하나를 고친다고 바로 바뀌는 문서가 아니다.
개정하려면 유엔 회원국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거기에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이 모두 각자 나라에서 비준 절차까지 마쳐야 한다.
반 친구들 다수가 동의해도 안 되고, 반장 다섯 명이 각자 집에 가서 부모님 도장까지 받아 와야 하는 셈이다.
그러니 2005년에 삭제 합의가 있었어도 헌장 문구는 그대로 남았다.
다카이치 총리가 이번에 요구한 것도 “새 규정을 만들자”가 아니다.
이미 없애기로 한 낡은 문장을 이제는 진짜 지우자는 얘기다.
🇨🇳 중국은 왜 이 조항을 다시 꺼냈나
그냥 오래된 문구라면 일본이 이렇게까지 유엔 연설에서 강하게 말할 이유가 없다.
이 조항은 최근 중일 갈등에서 다시 등장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해 11월 대만에 유사 상황이 생길 경우 일본이 개입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자 중국은 일본을 향해 유엔 헌장의 적국 조항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중국 외교부는 일본이 군국주의와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내놨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미 죽은 조항”이라고 여긴 문구가 중국의 외교 카드로 다시 날아온 셈이다.
그래서 이번 요구는 단순히 과거의 전범국 꼬리표가 싫다는 차원을 넘는다.
중국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드는 문구 자체를 유엔 헌장에서 없애겠다는 뜻에 가깝다.
다카이치 총리가 적국 조항 삭제와 안보리 개혁을 한 연설에서 함께 꺼낸 것도 같은 흐름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데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 거부권을 행사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상임·비상임이사국 수를 모두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80년 전 질서가 지금의 국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 낡은 조항이라고 그냥 넘길 일은 아닌 이유
적국 조항이 오늘 당장 일본을 공격할 수 있게 해 주는 만능 열쇠처럼 보긴 어렵다.
현실에서 이 조항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지를 두고 일본과 중국의 주장이 정면으로 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제정치에서는 법 조항의 실제 효력만큼, 그 조항을 누가 어떤 순간에 꺼내 드느냐도 중요하다.
종이 위에 남은 한 줄이 외교 무대에서는 “너희는 아직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공격 재료가 된다.
일본은 그 재료를 치우고 싶어 한다.
반대로 중국은 일본의 방위력 확대와 대만 문제를 경계하면서, 그 과거를 계속 상기시키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의 “명예” 발언은 그래서 조금 무겁게 들린다.
헌장 속 단어 하나를 지우는 일인데, 그 단어 뒤에는 일본의 군사 역할 확대와 대만, 중국, 안보리 자리가 한꺼번에 붙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