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 영화에 전도연, 설경구, 조여정, 조인성이 나온다.
이름만 보면 꽤 화려하다.
그런데 영화 제목은 〈가능한 사랑〉이고, 이야기는 해고 노동자 부부와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가 만나는 데서 시작한다.
로맨스인가 싶다가도, 제목이 조금 수상하다.
사랑이 가능한지 묻는 영화라면 보통 연애부터 보여줄 텐데, 이 영화는 누군가의 망가진 삶을 카메라에 담는 일부터 꺼낸다.
그리고 그 카메라를 든 사람이 조여정이 연기한 예지다.
📹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거야”라는 말
설경구가 연기한 호석은 해고 뒤 삶이 무너진 노동자다.
아내 미옥(전도연)은 공장에서 일하며 집안을 버틴다.
두 사람에게 파업은 끝난 과거가 아니다. 직장을 잃은 뒤에도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끝나지 않는 시간에 가깝다.
예지는 이 부부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는 감독이다.
겉으로만 보면 좋은 뜻처럼 보인다.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겠다는 거니까.
하지만 카메라가 장례식장까지 따라 들어오는 순간, 얘기가 달라진다.
호석은 화를 낸다.
“웃겨? 지금 이 모습이 웃기냐고?”
카메라를 든 사람은 “기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찍히는 사람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이 남의 작품 재료가 되는 일일 수도 있다.
〈가능한 사랑〉이 불편한 건, 예지가 악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마음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서다.
예지는 호석과 미옥의 삶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해하고 싶다는 말과, 정말 이해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남의 집 사정을 듣고 “나도 비슷한 힘든 일이 있었어”라고 말해본 적은 누구에게나 있을 거다.
위로하려고 꺼낸 말인데, 듣는 쪽은 “그거랑 이게 같나?” 싶을 때가 있다.
영화는 그 어긋남을 꽤 잔인하게 보여준다.
🏠 월세 20만원과 시카고 시급 7달러는 같은 얘기가 아니다
미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고, 의정부의 월세방에서 살며 동대문 봉제공장으로 출근했던 사람이다.
예지는 압구정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그도 유학 시절 시급 7달러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이 있다.
둘 다 돈을 벌어본 사람이다.
둘 다 힘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같은 ‘알바 경험’이라고 해서 같은 출발선은 아니다.
미옥에게 공장은 먹고사는 자리였고, 예지에게 시급 7달러 일은 유학 생활의 한 장면이었다.
한 사람은 그곳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다른 사람은 결국 돌아갈 곳이 있었다.
이런 차이는 대화할 때 잘 안 보인다.
서로 친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남아 있다.
그래서 예지의 남편 상우(조인성)가 예지에게 “메소드 연기”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까워지기 위해 상대의 삶에 들어가지만, 결국 그 삶을 완전히 살 수는 없는 사람의 모습 말이다.
▶ 그런데 노동자와 부자만 나뉘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더 까다로운 이유는 미옥도 누군가에게는 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옥은 정규직 노동자로서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와는 다른 자리에 선다.
회사 관리자와 관계를 맺는 동안, 자기보다 더 불안정한 사람의 삶은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그러니까 영화는 “부자는 나쁘고 노동자는 선하다”로 끝내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가 선 자리에서 누군가를 잘 못 본다.
회사에서 팀장과 사원 사이만 벽이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사원끼리도 계약직인지, 정규직인지, 누가 더 오래 다녔는지에 따라 말투가 달라진다.
직원 9명짜리 공장 안에서도 계급은 만들어진다. 사람 사는 곳은 참 좁은데 줄 세우기는 빠르다.
🎬 이창동 감독도 영화 밖에 서 있지 않다
이창동 감독은 이 이야기를 10여 년 전부터 생각했다고 한다.
대기업 정리해고와 파업 강제진압 사건을 보고 영화로 만들려 했지만, 오래 미뤘다.
자신이 과연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할 자격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언론시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저도 자본과 결혼한 사이인지 모른다. 창작자의 운명이다.”
이 말이 영화 속 예지와 이어진다.
예지도 남편의 돈과 시간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다.
그런 처지에서 노동자의 삶을 찍는다.
이창동 감독 역시 큰 자본이 필요한 영화 산업 안에서, 노동과 계급을 이야기하는 창작자다.
그래서 이 영화는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영화라기보다, 카메라를 든 사람도 같이 심문하는 영화에 가깝다.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로 만들면서, 그 고통을 훔치지 않을 수 있나.”
생각보다 무거운 질문이다.
영화 기자나 다큐멘터리 감독만의 얘기도 아니다.
누군가의 사연을 소비하는 콘텐츠를 보는 사람에게도 남는다.
우리는 슬픈 사연을 보고 공감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다음 영상으로 넘어간다.
그 공감이 아무 의미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공감했다고 믿는 것과, 상대의 삶을 내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다.
⏳ 164분, 친절하게 답을 주지는 않는다
〈가능한 사랑〉은 164분이다.
요즘 영화관에서 두 시간만 넘어도 화장실 위치부터 떠올리게 되는데, 이 영화는 질문을 여러 겹으로 쌓는다.
해고 노동자의 상처, 계급 차이, 부부 사이의 욕망, 창작자의 윤리까지 한꺼번에 들어간다.
쉽고 자극적인 영화는 아니라는 이창동 감독의 말이 맞아 보인다.
누가 완전히 옳고 누가 완전히 틀렸는지, 시원하게 판결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 따라 답답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영화가 오래 남을 것 같은 이유는, 질문이 너무 멀리 있지 않아서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누군가의 가난이나 상처를 쉽게 설명할 때.
“나도 알아”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올 때.
그때 한 번쯤 멈추게 한다.
사랑은 가능하냐는 제목의 질문은 결국 이런 말로 들린다.
상대의 삶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고도, 정말 가까워질 수 있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