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사 시험을 준비할 때 공인영어 점수는 그냥 “영어를 잘하면 좋은 것” 정도가 아니다.

지텔프(G-TELP) 레벨 2에서 65점 이상을 받으면 세무사 시험 영어 과목을 대신할 수 있다.

그 65점이 안 됐던 한 수험생은 시험공부 대신 시험지를 먼저 봤다.

그리고 AI에게 답을 물었다.

답은 오른쪽 손바닥에 적었다.

영어 점수 하나를 넘기려다, 시험 전체의 공정성을 훔친 일이 됐다.


📝 예비 시험지는 연습문제가 아니다

부산지법 서부지원은 절도와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수험생 A씨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고 사회봉사 80시간을 명령했다.

A씨는 지난 3월과 4월, 부산의 한 중학교 지텔프 고사장에서 두 차례 범행을 저질렀다.

감독관 배치 등을 확인하느라 시험본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교실에 있던 예비 시험지 봉투를 뜯어 시험지를 가져갔다고 한다.

여기서 예비 시험지는 혹시 시험지가 찢어지거나 인쇄가 잘못됐을 때 쓰려고 둔 여분이다.

“남는 시험지 한 부”가 아니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는 정답이 들어 있는 시험지와 똑같은 물건이다.

A씨는 가져간 시험지를 휴대전화로 촬영한 뒤 구글 AI 서비스 제미나이에 넣었다.

AI가 내놓은 답을 손바닥에 적고, 오후 시험에 응시했다는 게 법원 판단이다. 약 2주 뒤에는 같은 시험장에서 같은 방식으로 한 번 더 했다.

한 번의 충동도 아니었다.

시험지 절도 → AI 답 확인 → 손바닥 메모 → 응시라는 순서를 다시 밟았다.


🤖 AI가 문제의 시작은 아니다

이 사건 제목에는 AI가 가장 크게 걸린다.

“AI로 답을 알아냈다”는 장면이 워낙 세니까.

근데 순서를 거꾸로 보면 안 된다.

AI가 시험지를 훔친 게 아니다.

시험지를 먼저 훔쳤고, AI는 그 뒤에 부정행위를 완성하는 도구로 쓰였다.

계산기로 수학 숙제를 베껴 쓸 수는 있다.

그렇다고 계산기가 남의 답안지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이 사건도 비슷하다. 기술이 수법을 빠르게 만들었을 수는 있어도, 출발점은 아주 오래된 부정행위다. 남보다 먼저 문제를 봤다는 것.

AI 답이 정말 전부 맞았는지도 공개된 내용만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답률이 100점이든 50점이든, 다른 수험생이 시험 시작 전에는 볼 수 없는 문제를 봤다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 두 번이나 가능했던 빈틈

법원은 A씨가 두 차례 범행을 반복했고 수법도 대담했다고 봤다.

특히 시험은 기회가 공평해야 한다는 믿음 위에서 굴러간다.

누군가는 퇴근 뒤 문제집을 펴고, 누군가는 단어를 외우고, 누군가는 65점 문턱에서 몇 번을 미끄러진다.

그런데 누군가가 시험 시작 전에 문제를 들고 나가 AI에게 답을 물어볼 수 있다면, 점수는 실력이 아니라 먼저 본 사람의 보상이 된다.

재판부가 “선의의 경쟁자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줄 수 있다”고 한 이유도 그거다.

시험에서 제일 무서운 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열심히 푼 시험이 애초에 같은 조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 사건을 보면서 남는 질문도 있다.

첫 범행 뒤 약 2주가 지나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벌어졌다. 첫 사건이 어떻게 발견됐는지, 시험장 관리가 그 사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공개된 내용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시험 주최 측이 이 사건 뒤에 예비 시험지 보관이나 감독 공백을 어떻게 점검했는지는 알려졌으면 좋겠다.

시험장 문은 잠깐 비울 수 있다.

하지만 시험지는 잠깐도 비면 안 된다.


A씨는 피해자들을 위해 각각 10만원을 형사공탁했지만, 피해자들이 받기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럴 만하다.

돈을 놓고 보면 얼마 안 되는 금액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돈이 아니라 시간으로 65점을 만들려고 했을 테니까.

손바닥에 적은 몇 줄이, 생각보다 훨씬 비싼 메모가 됐다.